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뤄원간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1922년 [[1차 직봉전쟁]] 이후 베이징을 장악한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직예군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할 겸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구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던 구 국회와 약법을 회복하는 [[법통중광]]을 이루고 안휘파가 옹립한 대총통 [[쉬스창]]을 축출한 후 [[리위안훙]]을 새 총통으로 추대했다. 이로 인하여 남방에서 [[호법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쑨원]]은 더 이상 총통을 자처할 명분이 없어졌으며 [[후스]], [[차이위안페이]], [[리다자오]] 등 베이징의 지식인들은 <호인정부론>을 내세우며 훌륭한 인물들로 정치를 하면 정치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리위안훙의 총통 복직에 대해서 쑨원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 [[안휘군벌]]의 최후의 실력자 [[루융샹]] 등이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탕지야오]], [[루룽팅]] 등 서남군벌들도 베이징의 새 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연성자치론을 주장했으며 구 국회에서도 광동의 호법국회에서 보선된 '민팔의원'를 비롯한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복구된 국회에 합류하지 않았다. [[후스]] 등은 국무총리 [[왕충후이]]에게 남북화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으나 왕충후이는 직예군벌의 눈치를 보느라 이를 행하지 않고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여기에 1922년 7월부터 월급지불 정지 사태가 터지면서 5개월 넘게 급료가 밀린 교직원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교통총장 고은홍이 교직원들을 모욕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여덟개 국립대학의 교장들이 모두 항의사퇴하고, 육군부, 참모부, 사법부, 내무부, 농상부 등 각 부의 공무원과 군인들도 모두 파업했다. 여기에 왕충후이 내각은 인사 문제로 국회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고 왕충후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리위안훙의 필사적인 만류로 마지못해 총리로 근무 중이었다. 여기에 재정정책을 해결하려던 왕충후이를 의회는 내외채 모집시 반드시 국회의 의결을 거치게 해야 한다는 동의안을 상정하려고 하면서 견제하려 했고 내각 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